요즘 들어 날이 부쩍 추워졌어. 벌써 12월이라니, 시간이 참 금방 가는 것 같아. 꼭 12월엔 '벌써', '금방'이라는 말을 의례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아. 그만큼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아. 연말이라 그런지 한 해를 뒤돌아보는 시간을 자주 갖게 돼. 올해엔 어떻게 살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반추하면서 말이야.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뭘까 생각해 봤어. 몇 가지가 스치듯 지나가다가 명확하게 떠오른 건 바로 지금도 하는 '글쓰기'였어. 올해는 그 어떤 해보다 글을 많이 썼던 것 같아. 우선 너와의 서간문도 그렇고 혼자 쓰는 일기도 그렇고 좋은 문장, 시를 필사하는 시간도 포함이 돼. 올해엔 글을 쓰는 시간을 점점 좋아지게 됐어. 얼마 전에 새로 산 만년필로 빈 종이에 조금씩 끄적이다 보면 서걱거리는 소리로 주위가 금세 정리되는 기분이 들어. 글을 쓸 때엔 최대한 솔직하게 쓰려고 해. 평소 하지 못했던 말이나 생각을 과감하게 쓰다 보면 분명 나를 붙잡는 문장이나 단어를 만나게 되더라고. 그래서 그전에 썼던 글을 찬찬히 살펴봤는데 '여분'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더라고.
올해엔 일기장에 유독 ‘여분’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어. 아마 난생처음 육체노동을 하며 일과를 마치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에 집중하려고 했던 것 같아. 아이러니하게도 집에서 쉬는 시간에 자칫 집중하지 않으면 흐지부지하게 시간을 낭비하게 되더라고. 의미 없이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뒤적거리다가 시간을 낭비하는 게 싫었나봐. 그래서 다음날 출근하기 전까지 최대한 효율적으로 시간을 계획하게 돼. 특히 요즘은 유도를 배우고 있어서 12시에 잠들기 전까지 내 시간이랄게 별로 없어지더라고. (주로 멍때리는 시간 같은 것) 그러니까 나에겐 일 이외의 시간이 꼭 여분의 시간처럼 느껴져. 하루를 이미 다 살아냈지만, 왠지 모르게 퇴근 후 시간은 덤으로 얻은 것 같이 짧고 소중해서. 특히 퇴근 버스를 타고 집까지 40분 정도 가는 동안 그런 기분을 느껴. 버스 안의 사람들은 다들 피곤함에 지쳐 의자에 파묻혀 곯아떨어져 있는데, 그때가 참 노곤한 시간이야. 맑은 날이면 노을이 지는 걸 보다가 어느새 나도 깜빡 잠들어 있어. 그러다가 꼭 한 번은 커브를 크게 도는 구간이 있는데 버스가 한쪽으로 쏠릴 때 늘 같은 방향으로 사람들의 몸이 쉽게 흔들리는 걸 목격하곤 해. 마치 너울성 파도에 저항하기를 체념한 사람처럼 힘이 없어 보여. 그땐 내가 출근하기 전까지 주어진 시간이 꼭 여분의 시간 같다고 느꼈어. 오늘을 다 살아내고 일찌감치 내일의 경계에 선 기분이었거든.
어떻게 보면 너와 글을 주고받는 것도 나에겐 여분의 시간을 쥐어짜낸 산물일 거야. 쉽진 않았던 것 같아. 때로는 이미 오늘이 끝난 것 같은 피로감 때문에, 때로는 더 잘해보려는 욕심 때문에 번번이 글이 늦어지거나,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던 것 같아. 그런 조급함은 실은 토마토 학교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어진 일과를 다 소화하고 토요일에 미처 소진하지 않았던 힘을 쏟아냈던 기분이 들 때도 있었거든. 그때는 정말 머리가 말랑말랑하지 못해서 규칙대로 하지 않거나 시간 약속을 조금이라도 지키지 못하면 짜증부터 났어. 뭐랄까, 여유는 통장 장고와 체력에서 온다는 말을 실감하기도 해. 아무래도 토마토를 했던 시기엔 뭐든 부족했을 때였으니까.
하지만 나에겐 종종 생각지도 못한 여분의 힘을 갖게 되었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누워있는 시간도 좋아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것에 기분 좋은 활력을 느껴.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까 싶으면서도 막상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그 일이 기다려지기도 하고 설레기도 해. 토마토를 했을 땐 한주 내내 그랬던 것 같아. 힘들지만 설레는 일. 아이들과 활동을 하면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하게 됐어. 분명 이 정도면 체력이 방전되어야 하는데 어디선가 힘이 나기도 했어. 그런 여분의 힘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이미 오랫동안 그렇게 살고 있는 간사들, 짝꿍교사들, 부모님들에게서 나오는 자원이 아닐까. 나 혼자였다면 오래 하지 못했을 것 같아. 그럴 땐 주위에 말없이 묵묵하게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힘을 얻었어.여분의 힘은 결국 타자로부터 얻는 것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 글쓰기가 우리 뿐만 아니라 타자를 위한 것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
어제는 눈이 내렸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들뜨고 말이 많아지더라. 아직도 눈이 오면 설렌다는 게 감사한 하루였어. 그럼 다음 글을 기다리고 있을게.
십이월 십팔일, 일터에서.
현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