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연말이야 형. 다들 그렇듯이 무척 바빴어. 회사일이 바쁘기도 했고. 또 12월에는 괜히 약속을 잡게 되잖아. 이번 달에는 형을 만나러 전주에 다녀오기도 했네. 짧은 시간이었지만 형을 따라다닌 전주는 무척 낯설었어. 아는 게 한옥마을뿐이니 말 다했지. 형이 사는 집도 생경했고. 그 넓은 아파트에 별 다른 가구도 없이 혼자 살고 있다는 게. 문득 서로 편지를 주고 받기로 한 게 언제쯤이었나 싶어. 아마 내가 올 여름, 새 집으로 이사를 마친 후였을 거야. 그리고 그때 형은 아파트가 아닌 옛집에 살았잖아. 거기에도 내가 다녀갔었지. 생각해보면 서로 글을 쓰고 나누는 동안 나는 새 집을 얻고 형은 집이 바뀐 셈이야. 지난 한 해의 장면들이 설핏 눈앞을 지나가는 것 같아.
긴 시간 형과 내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나 돌아보면 실은 대단한 말들은 없지 않았어? 어쩌면 이미 잘 아는 이야기들. 무언가 기대했던 것 같아. 별안간 사라져버린 은평토마토학교에 대한 멋진 마무리 같은 거. 아마 내가 전주에 갔던 날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어. 토마토학교를 제대로 끝내지 못한 것 같다고 말이야. 그건 형도 비슷했지. 형이나 나나 토마토학교의 긴 여정을 마치는 이벤트 같은 걸 갖진 않았으니까. 은평토마토학교도 그렇고 형이 처음 시작했던 광진토마토학교처럼 우리가 애정을 쌓은 활동이 몇 가지 의사결정으로 아예 없던 일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근데 그래선 안된다고 믿은 거 아닐까. 형과 내가 편지를 주고 받게 된 이유는 우리들 자신에게 토마토학교와의 이별이라는 이벤트를 만들어주기 위함이라고. 아마 이런 이야기들을 나눴던 것 같아.
그래서 동의할 수 있겠어? 과연 성공적인 이벤트였는지에 관해. 어떤 장치가 필요했다는 것은 굳게 믿고 있어. 은평토마토학교가 문을 닫은 일이 너무 갑작스러웠으니까.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며 멋진 이별을 하고 모두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겼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아. 하지만 편지를 쓸 수록 난 아쉬움만 커지고 이 정작 이야기를 맺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라고. 기억을 되짚을 수록 못다한 말들이 너무 많았던 거야. 그동안 편지에 담았던 여러 고민들처럼 말이야. 토마토학교를 하며 느꼈던 부채감이라거나, 좋아서 시작한 활동이 일처럼 느껴질 때의 피곤함이라거나. 줄줄이 얘기한다고 해서 절묘한 답이 나오진 않더라고. 어쩌면 그게 너무 당연해. 마무리에 어떤 방법이 있는 건 아닐지 모르겠어. 혹시 내가 말했던 옐로라는 아이를 기억해? 자주 내게 메세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온다던 아이 말이야.
어느 날 생각해보니 그 아이의 연락이 끊겼더라고. 서서히 뜸해지다가 더는 연락이 없더라. 지난 편지에서 나는 우리가 만든 책을 들고 옐로를 찾아가고 싶다고 말했었지. 그때는 옐로가 매일 보내오는 연락들이 괜히 미안했어. 어딘가 내가 옐로와의 약속을 어겼다는 기분이 들었거든. 그런데 참 간편해. 옐로의 연락이 점점 줄어들고 나는 그걸 느끼지 못했다는 게. 어떤 이유였을까. 왜 더는 내게 연락을 주지 않을까. 이렇게 멀어지는 인연이라면 원래 마지막이랄 게 다 이런 건가 싶어. 우리가 긴 시간 편지를 주고 받은 일도 어쩌면 아주 많은 시간을 들이는 준비운동이었을지 모르겠어. 실은 오늘 이 마지막 편지를 쓰며 나는 이제야 토마토학교를 끝내는 기분이 들거든. 그동안 주고 받은 편지들로 차근차근 이별을 했다기에는 말이야. 사실 마무리에는 말 한 마디면 충분할지 몰라. 고생했다거나, 여기까지 하자라거나. 다만 그 말을 하기까지에 다짐 같은 게 필요하고 그 다짐을 내 뜻대로 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이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같아.
오늘부로 은평토마토학교의 일들은 지난 일로 삼으려 해. 이렇게 한 문장 쓰는 일로 나의 작은 이벤트가 마무리되는 기분이야.
재밌는 건 이 편지를 마무리하는 오늘은 1월 2일이라는 점이야. 글을 쓰다보니 한 해가 지났어. 괜한 의미부여인지 모르겠는데 한 장을 마무리하고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기분이 들어. 올해에는 민아누나와 함께 금천토마토학교를 시작해보기로 했거든. 코로나 때문에 토마토학교가 쉬어간지 벌써 2년이 더 되었어. 아마 새로 만드는 느낌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아. 그래서 더 설레나봐.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는 더 잘해야지 같은 마음. 아마 같은 실수가 있겠지만 잘 추스르며 가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연락이 끊겼다고 생각했던 옐로에게서 영상통화가 왔어. 어제 일이야. 다짜고짜 영상통화가 오더니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하더라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애먹었어. 옐로가 계속 음소거를 풀지 않고 말하는 거야. 내가 보기엔 입만 뻥긋거리는 것 같아서 음소거 된 거 아니냐고 되물었는데 가만히 웃기만 하더라고. 그래서 나도 웃었어. 둘이 한 동안 별 말 없이 웃기만 했어. 며칠 전에 나는 옐로와 서서히 멀어진다며 센치해지기도 했는데 말이야. 별 얘기 아닐 수 있는데 이별이 꼭 끝은 아니라고 생각해. 종이의 면적이나 필름의 길이처럼 물리적인 끝이 있는 게 아닌 한 세상 모든 건 계속 이어지니까.
새해 복 많이 받아 형. 올해는 코로나가 끝이 나겠지? 그땐 그리운 얼굴들을 다시 보고 싶어.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2022년 1월. 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