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의 시작을 복기한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끝난 상태이거나 지속할 힘을 잠시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활동도 그러하다. 이제 그만하자, 라고 말할 땐 이상한 확신 같은 게 켜켜이 쌓여 평소보다 더 힘주어 말했다. 그 말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밤길엔 마음이 후련하고 발걸음이 가볍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의 확신은 활동으로부터 한참 멀어져 삶의 난관을 정신없이 통과하고 있을 때 불현듯 발걸음을 무겁게 붙드는 질문으로 떠올랐다. 때론 그 물음은 예고 없이 쏟아지는 여름의 소나기를 무방비 상태에서 맞은 것처럼 온몸을 적시곤 했다. 왜 시작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왜 끝이 나게 되었을까.
처음 활동의 시작은 교회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기독교는 태어나자마자 나에게 강요된 종교였다. 나는 개인의 영성에만 매달리는 한국교회의 문화와 과도하게 죄책감을 일으키는 설교에 싫증을 느꼈고 그게 나의 믿음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참 자아와 초자아 사이에서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하며 스스로 그리는 이상적인 사람에 도달하려고 노력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노력은 기독교 단체라고 주장하는 한기연과 만나 보다 실천적인 것들에 몰두하게 되면서 서서히 내면에서 무게중심을 잡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실천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토마토학교는 그 중심 잡기의 일환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활동을 그만둔지 몇 년이 지나서, 가끔 생일 알람으로 상단에 뜬 아동의 어머님 프로필 사진을 눌러보면 몰라본 사이에 훌쩍 커버린 아이의 모습도 함께 보게 된다. 평소 같았으면 '많이 컸네, 길에서 마주치면 그냥 지나치겠는데?' 하며 무심히 지나갔겠지만, 코로나 상황이 악화된 요즘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외출은 제대로 하고 있을까, 누가 돌보고 있는 사람은 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 생각의 꼬리가 길어지면 예전에 찍은 활동사진과 영상이 보고 싶어진다. 오랜 습관이다. 더는 사용하지 않는 외장하드 속에 담겨있는 과거의 활동사진을 확대하고 또 확대하고 확대하다 보면 그때 아이의 얼굴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동시에 지금은 그때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걸 깨닫기도 한다. 나는 더는 대학생이 아니고 아이도 청년이 되었다. '아, 지금은 역병의 시대지.' 매일 같이 늘어나는 확진자 숫자에 쉽게 활동을 재개할 수 없는 현실을 자각하면 그때의 마음도 축소되는 것 같다. 사진에 박제된 나의 경험과 아이들의 모습은 더는 좁혀지지 않는 큰 격차가 생긴 것이다.
그러다 어쩐지 이 격차는 해소되지 않을 것처럼 비현실적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수염이 거뭇거뭇 올라온 아이의 현재 사진은 실종된 성인 발달장애인이 마스크를 끼지 않고 돌아다닌다는 뉴스와 겹쳐서 다가오고, 외출을 할 수 없어 집안에서 발달장애인의 돌봄을 떠안은 부모가 자식과 함께 안타까운 선택을 한 소식을 접할 때면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며 다른 어머니의 프로필 사진을 찾아보며 긴장을 하게 된다. 우리 애들은 잘 지낼까? 어머니는 괜찮으시겠지? 나는 다시 한번, 이 질문에 먹먹해진다.
이 책은 그 먹먹함을 자각하며 만들게 되었다. 또한 비슷한 나이의 두 사람이 한 시절을 함께 활동을 경유하며 느낀 대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대화가 반드시 절단나버린 추억을 아련하게 회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머지않은 미래에 꼭 우리가 아니더라도 이 책을 읽는 누군가가 대신 이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쉽사리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시절을 살고 있다. 약속은 취소되고 모임을 사라졌지만, 토마토 학교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는 여전히 읽는 이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이야기는 우리를 상상하게 하고 상상이라도 해야 뭐라도 바뀐다고. 바라건대, 그 시작점을 애써 떠올려야 하는 끝나버린 이야기를 하는 대신 현재도 부단히 진행 중인 이야기를 마주하길 바란다. 2021년 8월 12일, 세차게 내리는 여름 소나기를 피하지 못한 전주에서.